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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독서

20210313 7년의 밤 - 정유정

by wohlsein 2021. 3. 14.

19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반? 텔레비전에 많이 나오던 내용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책이었다. 절대적인 악이 있고, 그 악인과의 끈질긴 악연이 평범하고 착한? 주인공과 주인공 주변인을 끊임없이 옭아매는 그런 내용의 드라마. 읽기 시작하면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보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책 표지에 있는 "사실과 진실 사이"라는 문구가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사실과 진실 사이에 '그러나'가 있다고 한다. 덧붙여, 눈에 보이는 사건의 서술은 사실일 수 있지만, 그 사실 속의 객체, 관계와 역사를 느낄 수 있을 때 진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사실과 진실은 화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

 

이 책이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또다시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게 하는 먹먹한 해피엔딩이었다. 난 끔찍한 새드엔딩이 너무 싫다. 그리고 사실과 진실 속에서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설득력이 있었다는 것이 좋았다.

 

 

너무나도 평범한 서민의 삶을 사는 서원이의 가족.

고교시절 야구 유망주였지만 과거의 트마우마로 야구를 그만두고, 경비일을 하는 술 좋아하는 통제불능 아빠 현수.

가족들에게 지겹도록 잔소리하는 억척스러운 엄마 은주.

그들의 전부와 같은 아들 서원.

 

아빠 현수와 엄마 은주는 각자의 유년기를 가난한 가정에서 어렵게 살아낸 사람들이다. 현수는 아빠로부터, 은주는 엄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고, 서원에게는 그러한 환경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책의 내용상 현수와 은주의 부모도 그들의 방식으로 자식을 사랑했던 것 같지만 '사실'은 학대였다.)

 

 

하지만 아빠 현수는 음주운전 중 세령이라는 여자아이를 차로 치게 되고, 그 후 그의 한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그의 가족들은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을 겪게 된다. 그리고 영제가 꿈꾸는 가정 또한 그 사건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영제는 세령이의 아빠이자 세령 마을의 지주이다. 영제는 자신의 방식으로 현수와 그의 가족을 자신의 함정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들을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인물이자, 서원의 룸메이트 승환.

 

현수의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모두를 계속해서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한다. 바로잡을, 혹은 비극 속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들을 계속해서 놓치면서..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동안, 현수는 가족을 지독히 괴롭히던 자신의 아빠를 자신에게 더 깊이 투영시킨다. 그러는 동안 은주 또한 자신의 엄마를 닮아가는 듯했다. 그리고 서원은 다시 부모의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기억한다. 어쩌면 더 지독하게..

 

아빠 현수의 사형과 엄마 은주의 죽음이 마지막에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던 것이, 어쩌면 서원이 세상을 계속해서 살아 줄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정을 들고 다시 세상 앞에 서는 서원이의 모습이 그러했고, 아버지를 보내며 '해피 버스데이'라는 기쁜 단어를 내뱉은 서원이의 모습이 그러했다. 비록 그 삶이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그리고 승환이라는 도깨비같이 든든한 존재 또한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서원이를 계속해서 지켜줄 것만 같았다.

 

 

책을 읽는 동안에 나는 그 어느 등장인물도 책망하지 않았다. 모두가 나름의 불우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읽고서 돌이켜보니, 자신과 관련된 모두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간 현수라는 인물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는 생각은, 이런 답답한 모습이 너무나도 일반적인 사람의 행동이 아닐까 싶다. 트라우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자신의 과오를 덮으려고 시도해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독하게 꼬인, 그 어느 누구도 풀 수 없을 것만 같은 실타래를 가지고 살까. 그렇지만, 이토록 크나 큰 불행으로 빠져들게 하는 너무나도 슬픈 순간의 선택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날까? 부디 나와 내 주변의 모든 이에게는 언제나 견딜 수 있는 선택지만 있기를 바란다. 크기를 알 수 없는 잘못을 자신의 작은 몸으로 덮어보려 애쓰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최악이라고 생각되는 순간보다 더 최악이 있고, 그 최악의 순간에도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있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 내가 용기 내 또다시 발을 내딛는다면 나의 세상은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줄이고, 용서하는 마음을 더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봤다.

당연히 모든 죄를 포용할 순 없지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의 스토리를 들여다 봐주고 최소한 측은지심을 가져볼 순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가족들이 어쩔 수 없이 지고 가야 할 앞으로의 삶을 간접적으로 나마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선생은 '자유의지'라는 단어를 칠판에 적더니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자기 삶을 지킬 수 있다." 

 

... 아버지는 당신이 남긴 책의 제목처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한 것일까.

 

"집행 직전에 뭐라 했는데 목소리가 낮아 알아듣지 못했었요. 다시 말해달라고 하자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곁에서 두건을 씌워준 직원이 듣기로는..."
교도관은 시선을 관으로 내렸다.
" 고맙소,라고 한 것 같답니다."